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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08 1977년생 그들의 이야기

1>
최근 '88만원 세대'를 읽었다.
그런 사회, 문화적 아이콘으로 대변하자면
나는 X세대나 신세대 혹은 초창기 수능 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스무살이 되었던 1996년은
김영삼 대통령 재임 기간이었다.
당시에 사회 현상에 대한 다양한(사실 그렇다고 볼 수도 없지만)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고들 생각했었나보다.
학생 운동으로는 거의 막차를 탔던 시기였지만  
그 목소리를 대변할 만큼
분명한 이론적인 근거를 가지지 못했었던 것 같다.
학생 운동의 중심이었던 386세대나
소위 IMF세대로 불리는 1998년을 전후로 대학을 졸업한 선배들에게는
철없는 후배들로 여겨졌을 뿐이었고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시작될 무렵부터는
디지털 세대도 아니고 아날로그 세대도 아닌 어정쩡한 세대로 분류되어져서
곧 N세대나 Y세대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물론 N세대나 Y세대로 불리기도 하지만
행운의 숫자 '7'이 두 번이나 들어가는, 백년에 한 번 돌아오는
특별한 1977년에 태어난 우리는
사실 X세대나 신세대, 수능 세대라 불리기에도
특별하거나 개성있는 나이가 아니었던 것 같다.
 
2>
포털 사이트 교육 토론방에 들어가면
이해찬 세대라 불리는 이들의 하소연이 넘쳐나던 시기가 있었다.
학번으로 따지자면 02학번 이후가 되는데
그들의 투정엔
'우리 때가 더 힘들었다.'
'너희들이 학력고사를 아느냐.'
'수능 두 번 치뤄보면 그런 소리 안나온다.' 등의
댓글들이 많았다.
사실 나도 댓글 한 줄 달고 싶었지만 우린
선 지원 후 시험의 맞짱 대입도 아니었고
잘못 지원했다가는 고스란히 재수를 해야 했던 학력고사 시절도 아니었다.
수능 첫 세대는 아리송한 시험 문제를 두 번이나 풀어야 했고
어떤 학번들은 수능을 앞두고
출제 경향이나 대입요강이 갑작스레 바뀌기도 했다지만
우리는 한국 사회가 수능 제도에 익숙해질 무렵
다소 난위도가 높았다는 것 외엔 특별할 것 없이
대학 당국도 감을 못 잡은 본고사를 치루고 그냥 그렇게 대학에 입학했었다.
 
나의 댓글은
'힘드시겠군요.'였다.
 
3>
1996년 한양대학교에도 심한 데모가 있었다.
그 때 프락치로 오인받았던 정신 지체를 앓던 사람이
학생회관으로 끌려가 구타 끝에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는데
정문으로 내려오다 학생들에게 붙들려 가던 그를 보았었다.
그 순간엔 어떤 상황인지 몰랐지만
최류탄 메케한 냄새를 웃옷으로 막으며 하숙집으로 돌아가던 나는
내가 사는 세상의 어떤 곳들은
참 고생스럽겠다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 분이 정말 프락치였을지
혹은 10년이 넘도록 내가 오해하고 살았을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사는 세상의 어떤 곳들은
참 고생스럽겠다라고 생각하며
서른 두 해 째를 살아가고 있다.
 
그 날을 나와 함께 경험했던 친구들은
이제 '대리'라는 명함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자신의 책임으로 누군가를 대신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4>
성장과 분배에 관한 논쟁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국 문학을 풍성하게 만든 1908년생 文人, 그들은...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유치환, 이무영, 김유정, 임화, 김기림 등 1908년에 태어난
한국 문학의 거장들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서
100년이 지나면 1977년에 태어난 이들은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될까가 궁금했던 것이다.
단지 내가 그 해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뭔가 특별하기를 바라는 소심한 희망을 가져보다가
세상이 보는 1977년생에 대한 시선은 어떤걸까를 생각했던 것이다.
 
5>
사실 내가 76년에 태어났거나 78년에 태어났어도
혹은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 태어났어도
지금의 의문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커다란 역사의 흐름속에서
내 나이 또래가 어떻게 정의되는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내는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6>
나는 비린 바닷 바람이 부는 어촌에서 태어났고
밭에서 캐온 고구마를 간식으로 먹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포니 픽업을 타고 비포장도로를 질주하셨고
어떤 날은 수퇘지 등에 올라타 동네를 질주하기도 하셨다.
새벽 닭우는 소리에 잠이 깼던 나는
휑한 겨울 논을 놀이터 삼아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고
꽁꽁 언 냇가에서 붕어를 잡다가
손등이 부르터서 어머니의 오래된 바셀린 로숀을 바르고 얼굴을 찡그리며 잠들기도 했다.
 
하지만
CD플레이어가 달려있는 오디오에 샀던 밤엔
온 가족이 설레어 밤이 늦은 줄도 몰랐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로 이사갔던 날에는
2층에서부터 15층까지 버튼을 모두 누르고는
심장이 쿵쾅거려 뒤도 안돌아보고 계단으로 뛰어내려 와버린 적도 있다.
형이 산 컴퓨터로 카드게임을 하다가
눈이 시뻘게 진게 자랑스러워서 한참을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고구마와 수퇘지와 겨울 냇가의 붕어,
CD플레이어와 엘리베이터와 컴퓨터를 동시에 경험한
행운의 세대는
갑자기 빨라진 변화에 정체성을 잃었다고 하기에도 조금 어색하고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고 하기에도 조금 더딘 것 같아
빨리 100년이 지나면
1977년생은 어떤 삶을 살아냈다고 말해 줄 지
궁금할 따름이다.
 
7>
나는 '88만원 세대'와 함께 대학을 다니고 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강의를 진행하시는 교수님들에게
충분히 공감하지만
곤한 푸념을 내뱉는 직장인 친구들을 보면
내가 '88만원 세대'로 살아가는 것이
감사한 일로 여겨지는 역설의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77년생의 최은호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최은호의 소중한 인생을 열심히 살아내야 할 나를 알게 되는
감사한 깨달음이다.
 
바쁘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당신에 비해
그 발자취를 차근히 검색해가며 뒤따라가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특별하기도 하고 특별할 것도 없는 '1977년생'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난 1998년에 입대했다.
1998년의 초등학교 6학년은 1986년생이다.
날 아저씨라고 부르며 간혹 위문편지를 단체로 써대기도 했던 친구들이다.
지금은 스물 세 살 대학교 4학년이다.
 
난 1989년에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21살에 군대에 입대했다면 1969년생일 아저씨들에게
나도 위문편지를 단체로 써대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은 마흔 살이고 내가 아저씨라고 부르면
'친구야~ 왜 이래?'라고 농을 건넬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에헤라디야.....


@ 출처 : 다시 돌아오는 길 (네이버 블로그)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